▲ 한국화학연구원이 구축한 DEL 코어뱅크 플랫폼의 기존 HTS(고속 스크리닝) 방식과 신규 DEL(유전자 암호화 라이브러리) 방식의 유효 화합물 탐색 구조 차이를 비교해 보여주고 있다.국내 산·학·연 연구자들이 고비용 해외 서비스 의존 없이 수천만 개 화합물을 동시에 탐색할 수 있는 공공 신약개발 인프라가 마련됐다. 초기 후보물질 발굴 기간과 비용을 크게 줄이면서 국내 신약개발 생태계의 연구 효율성과 자립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화학연구원(원장 신석민)은 델(DEL)기술연구단이 유전자 암호화 라이브러리(DNA-Encoded Library, DEL) 기반 신약 탐색을 지원하는 ‘DEL 코어뱅크 플랫폼’을 국내 최초로 개시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플랫폼은 신약개발 초기 단계인 ‘유효물질 발굴(hit discovery)’ 과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구축됐다. 연구자가 원하는 질병 타깃 단백질을 제시하면, 화합물 라이브러리 제공부터 스크리닝, 데이터 분석, 후속 검증까지 연구 단계별 맞춤형 지원을 받을 수 있다.
DEL 기술의 핵심은 각 화합물에 고유한 DNA 서열을 ‘바코드’처럼 부착해 수천만 개 화합물을 하나의 용액에 혼합한 뒤 동시에 탐색하는 방식이다. 기존 고속 스크리닝(HTS)이 각각의 화합물을 분리된 실험 용기에서 순차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이었다면, DEL은 대규모 화합물을 한 번에 탐색할 수 있어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존 HTS 방식으로 100만 개 화합물을 분석하려면 384웰 기준 하루 60장씩 처리해도 43일, 즉 2개월 정도 걸린다. DEL은 수천만 개 규모의 화합물도 약 한 달 이내 탐색이 가능하다. 대량의 단백질 시료가 필요했던 기존 방식과 달리 시료 소모량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DEL 기술 구현 방식도 기존 스크리닝과 차별화된다. 우선 100개의 실험 칸(Well)에 서로 다른 화학 구조인 ‘빌딩 블록(Building Block, BB)’과 DNA 바코드를 넣어 결합시킨 뒤 이를 하나의 용액으로 혼합한다. 이후 다시 100개로 분리해 새로운 화학 구조와 DNA를 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면 1만 개의 서로 다른 화합물이 만들어진다.
이 같은 합성·분리 과정을 빌딩 블록 A, B, C 각각 100종씩 세 차례 반복하면 이론적으로 100만 개 이상의 화합물 혼합 용액을 구축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수천만 개 규모 라이브러리까지 확장이 가능하다.
이후 질병 관련 단백질과 반응시켜 어떤 DNA 바코드가 선택적으로 살아남았는지를 읽어내는 NGS(차세대 염기서열 분석, Next Generation Sequencing) 과정이 진행된다. 수천만 개 DNA 조각을 동시에 해독한 뒤 이를 원래 화학 구조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하는 방식으로, 단기간 내 유효 후보물질을 압축해낼 수 있다.
다만 DEL은 화합물 자체가 아닌 DNA 결합 상태에서 실험이 진행되기 때문에 불순물과의 비특이적 결합이나 특정 DNA 서열의 과다 증폭 등 오류 가능성이 존재한다. 화학연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AI 기반 분석 기술을 도입했다. 대규모 실험 데이터를 학습시켜 특정 화학 구조가 특정 단백질과 높은 결합력을 보이는 패턴을 예측하도록 함으로써 후보물질 선별 정확도를 높였다.
최종적으로는 살아남은 유효물질 가운데 신약 후보 가능성이 높은 상위 50개를 기계학습 기반 데이터 분석으로 선별해 보고서를 제공한다. 필요하면 DNA 바코드를 제거한 순수 화합물을 다시 합성해 연구자가 요청한 질병 단백질과의 실제 활성까지 검증해주는 후속 지원도 제공한다.
이번 플랫폼 구축은 그동안 국내 연구자들이 겪어온 해외 의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도 담고 있다. DEL 기반 탐색 서비스는 일부 글로벌 기업 중심으로 운영돼 왔으며, 국내 연구자들은 높은 비용과 기술·정보 유출 우려 속에서 서비스를 이용해야 했다.
화학연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의 ‘대용량 유전자 암호화 라이브러리 플랫폼 기반 코어뱅크 구축 사업’ 지원을 받아 2027년까지 한시적으로 서비스 비용의 50%를 감면할 계획이다. 현재 대웅제약, 아이랩, 국립암센터, 이화여대, 광주과학기술원(GIST) 등이 우선 지원 대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화합물은행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허정녕 DEL기술연구단장은 “DEL 기술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초기 유효물질 탐색부터 후속 검증까지 국내에서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신석민 한국화학연구원장은 “국내 기술로 구축한 DEL 코어뱅크 플랫폼을 통해 국내 연구자들이 보다 빠르고 경제적으로 첨단 신약개발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화학연은 이번 플랫폼을 기반으로 암, 면역질환, 감염병 등 다양한 분야의 저분자 신약 후보물질 발굴을 확대하고, 실제 신약개발 성과로 연결해 나간다는 계획이다.